가스통 드 푸아느무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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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스통 드 푸아느무르 공작은 1511년 프랑스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이탈리아 전쟁에 참전한 인물이다. 그는 21세의 젊은 나이로 이탈리아에서 활약하며 프랑스군에 승리를 안겼으나, 1512년 라벤나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죽음은 프랑스에 큰 손실을 가져왔으며, 밀라노에 정교한 무덤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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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통 드 푸아느무르 공작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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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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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가스통 드 푸아 |
로마자 표기 | Gaston de Foix |
작위 | 나르본 남작 누무르 공작 |
재임 기간 | 나르본 남작: 1500년 - 1512년 누무르 공작: 1507년 - 1512년 |
출생지 | [[File:Flag of the County of Foix.svg|border|25px]] [[파일:Flag of the County of Foix.svg|보더|25픽셀]] 프랑스, 푸아 백작령, 마제르 |
사망지 | 라벤나 |
사인 | 전사 |
매장지 | 밀라노, 스포르체스코 성 |
가문 | 푸아 가 |
아버지 | 나르본 남작 장 드 푸아 |
어머니 | 마리 도를레앙 |
경력 | |
직책 | 군사 지휘관 |
기타 정보 |
2. 가족 관계
가스통은 장 드 나르본 자작과 마리 도를레앙의 아들이다. 그의 조부모는 푸아 백작 가스통 4세 드 푸아와 나바라 여왕 레오노르였다.
1511년 21세의 젊은 나이로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된 가스통 드 푸아는 캉브레 동맹 전쟁 (광의의 이탈리아 전쟁)에서 활약했다. 용맹하고 과감한 전투로 프랑스군에 수많은 승리를 안겨주었지만, 1512년 4월 11일 라벤나 전투에서 전사했다. 프랑스군은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총사령관의 전사로 인해 사기가 저하되었고, 이 승리를 전략적으로 유효하게 활용하지 못한 채 결국 퇴각을 강요당했다.[5]
외할아버지는 샤를 도를레앙으로, 어머니 마리는 루이 12세의 여동생이었기에 가스통은 프랑스의 국왕 루이 12세의 조카가 된다. 누이 제르멘은 아라곤 왕 페란도 2세(할머니 레오노르의 이복동생)의 왕비가 되었다.
3. 생애
3. 1. 초기 생애와 군사 경력
푸아 백국 마제르에서 태어난 그는 나르본 자작 푸아의 장과 오를레앙의 마리의 둘째이자 외아들이었다.[2] 그의 누나는 아라곤의 왕비로서 페르디난드 2세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푸아의 제르메인이었다. 그의 부계 조부모는 푸아-그라일리의 가스통 4세와 여왕 나바라의 엘레오노르였으며, 모계 조부모는 오를레앙 공작 오를레앙의 샤를과 클레베의 마리였다. 그의 유일한 외삼촌은 프랑스 국왕 프랑스의 루이 12세였다.
1511년, 가스통은 21세의 젊은 나이에 새로운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어 이탈리아에 도착했다.[3][4] 그의 존재와 그가 품고 있는 강한 열정과 활발한 움직임은 그동안 침체되었던 프랑스군에게 활기를 불어 넣었다.
1511년 5월 13일 볼로냐가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하자,[3][4] 나폴리 총독 라몬 데 카르도나는 프랑스군을 포위하기 위해 교황-스페인 연합군을 이끌고 볼로냐로 진격했다. 가스통이 그의 군대를 볼로냐로 진격하자 신성 동맹의 군대는 흩어져 버렸다. 그 다음 가스통은 북쪽으로 진격하여 베네치아 및 브레시아를 맹렬히 공격하여 점령하였다(1512년 2월).
1512년 가스통은 북부 이탈리아 전역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그의 군대는 이제 남쪽으로 진격하여 라벤나를 포위하고 이곳으로 스페인 군대를 끌어들여 결전을 벌일 예정이었다. 카르도나가 이끄는 교황-스페인 연합군은 프랑스 전선에 조심스럽게 접근해 강력한 방어진을 쳤다.
이때 가스통의 전력은 대략 23,000명의 병사와 8,500명의 독일 란츠크네히트 용병 및 54문의 대포였는데 이에 대항하는 카르도나의 군대는 16,000명의 군대와 30문의 대포, 그 외 라벤나를 수비하는 병력 5,000명 정도였다. 가스통은 중세의 관습대로 결투장(전쟁을 벌이겠다는 전투장)을 보내고, 카드로나는 순순히 응했다.
1512년 4월 11일 라벤나 전투가 벌어졌고 스페인군은 론코강을 배후로 두고 유명한 공학기사 출신 장군인 페드로 나바로가 정면에 참호를 파서 강력한 방어진지와 장애물을 만들었다. 가스통은 라벤나성을 감시하기 위해 2,000명을 남겨두고, 남은 군을 이끌고 카르도나의 군대와 대치했다. 프랑스군은 라벤나성과 스페인 진지 중간에 위치해 양쪽의 합류를 막고, 스페인군이 만든 참호에 맞서 반원형의 형태로 진형을 만들어 전투 개시 시 스페인군의 측면을 공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전투가 시작되고, 강력한 프랑스군의 중포의 대량 포격에 방어벽이 있던 스페인 보병은 견딜 수 있었으나, 포격에 그대로 노출된 스페인군 기병이 명령도 없이 프랑스군을 향해 돌격했다. 이 공격을 손쉽게 막은 프랑스군은 역습을 시작했다. 피비린내 나는 1시간 동안의 혈전 끝에 란츠크네히트는 스페인 참호에 침입했다.
이를 보고 2문의 대포를 스페인군 후방으로 이동시켜, 적의 전선을 공격하자 스페인군 후방은 큰 혼란에 빠져 무너지기 시작했다. 스페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퇴각 할 수밖에 없었다. 퇴각하는 스페인군을 추격하던 가스통의 기병대 돌격을 막은 스페인군 보병대에 가스통은 전사하고 말았다.[5] 프랑스군에게 입은 스페인군 피해는 9,000명 정도로 상당히 피해를 입었으며 또한 포로 중에는 페드로 나바로도 있었다.
가스통의 죽음은 프랑스에 엄청난 손실이었다. 이 젊고 용맹한 전사가 보여준 놀라운 재능과 뛰어난 지휘는 프랑스에 연속으로 승리를 안겨 주었다. 만약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이탈리아 전쟁은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3. 2. 이탈리아 전쟁에서의 활약
1511년, 21세의 젊은 나이에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된 가스통은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그의 존재와 열정은 침체되었던 프랑스군에게 활기를 불어넣었다.[2]
1511년 5월 13일, 프랑스군은 볼로냐를 점령했다.[3][4] 나폴리 총독 라몬 데 카르도나가 이끄는 교황-스페인 연합군이 프랑스군을 포위하려 했으나, 가스통이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자 신성 동맹 군대는 흩어졌다. 이후 가스통은 북쪽으로 진격하여 베네치아와 브레시아를 점령했다.(1512년 2월)
1512년, 가스통은 북부 이탈리아 전역을 장악하고 남쪽으로 진격하여 라벤나를 포위, 스페인 군대를 끌어들여 결전을 벌이려 했다. 카르도나가 이끄는 교황-스페인 연합군은 강력한 방어진을 구축했다. 가스통은 약 23,000명의 병력, 8,500명의 독일 란츠크네히트 용병, 54문의 대포를 보유했고, 카르도나의 군대는 약 16,000명의 병력, 30문의 대포, 그리고 라벤나 수비 병력 5,000명 정도였다. 가스통은 결투장을 보냈고, 카드로나는 응했다.
1512년 4월 11일, 라벤나 전투가 벌어졌다. 스페인군은 론코강을 등지고 페드로 나바로가 만든 참호와 장애물로 방어했다. 가스통은 2,000명을 남겨 라벤나성을 감시하고, 반원형 형태로 진형을 짜 스페인군 측면을 공격할 수 있게 했다.
프랑스군의 포격에 스페인군 기병이 명령 없이 돌격했으나 격퇴되었고, 프랑스군은 역습했다. 란츠크네히트가 스페인 참호에 침입했고, 가스통은 2문의 대포를 스페인군 후방으로 이동시켜 공격, 스페인군은 큰 혼란에 빠져 퇴각했다. 퇴각하는 스페인군을 추격하던 가스통은 스페인군 보병대에 의해 전사했다. 스페인군은 9,000명 정도의 피해를 입었고, 페드로 나바로도 포로로 잡혔다.[5]
가스통의 죽음은 프랑스에 큰 손실이었다. 그의 뛰어난 지휘는 프랑스에 연속적인 승리를 안겨 주었고, 그가 살아있었다면 이탈리아 전쟁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3. 3. 라벤나 전투와 죽음
1511년 가스통은 21세의 젊은 나이에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어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그의 존재와 열정은 침체되었던 프랑스군에게 활기를 불어넣었다.[2] 1512년 가스통은 북부 이탈리아 전역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그의 군대는 남쪽으로 진격하여 라벤나를 포위하고 이곳으로 스페인 군대를 끌어들여 결전을 벌일 예정이었다.
라몬 데 카르도나가 이끄는 교황-스페인 연합군은 프랑스 전선에 조심스럽게 접근해 강력한 방어진을 쳤다. 이때 가스통의 전력은 23,000명의 병사와 8,500명의 독일 란츠크네히트 용병 및 54문의 대포였는데, 이에 대항하는 카르도나의 군대는 16,000명의 군대와 30문의 대포, 그리고 라벤나를 수비하는 병력 5,000명 정도였다. 가스통은 중세의 관습대로 결투장을 보냈고, 카드로나는 순순히 응했다.[5]
1512년 4월 11일 라벤나 전투가 벌어졌다. 스페인군은 론코강을 배후로 두고 페드로 나바로가 정면에 참호를 파서 강력한 방어진지와 장애물을 만들었다. 가스통은 라벤나성을 감시하기 위해 2,000명을 남겨두고, 남은 군을 이끌고 카르도나의 군대와 대치했다. 프랑스군은 라벤나성과 스페인 진지 중간에 위치해 양쪽의 합류를 막고, 스페인군이 만든 참호에 맞서 반원형의 형태로 진형을 만들어 전투 개시 시 스페인군의 측면을 공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전투가 시작되고, 프랑스군의 중포 포격에 방어벽이 있던 스페인 보병은 견딜 수 있었으나, 포격에 노출된 스페인군 기병이 명령도 없이 프랑스군을 향해 돌격했다. 이 공격을 손쉽게 막은 프랑스군은 역습을 시작했다. 1시간 동안의 혈전 끝에 란츠크네히트는 스페인 참호에 침입했다.
이를 보고 2문의 대포를 스페인군 후방으로 이동시켜, 적의 전선을 공격하자 스페인군 후방은 큰 혼란에 빠져 무너지기 시작했다. 스페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퇴각하는 스페인군을 추격하던 가스통의 기병대 돌격을 막은 스페인군 보병대에 가스통은 전사하고 말았다. 프랑스군에게 입은 스페인군 피해는 9,000명 정도로 상당히 피해를 입었으며, 포로 중에는 페드로 나바로도 있었다.[5]
가스통의 죽음은 프랑스에 엄청난 손실이었다. 이 젊고 용맹한 전사가 보여준 놀라운 재능과 뛰어난 지휘는 프랑스에 연속으로 승리를 안겨 주었다. 만약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이탈리아 전쟁은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3. 4. 사후
1512년 라벤나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승리했지만, 총사령관이었던 가스통은 전투 막바지에 퇴각하는 스페인 보병 부대를 추격하다가 전사했다.[5] 그의 죽음은 프랑스군에 큰 충격을 주었고, 결국 북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군이 철수하는 원인이 되었다.
가스통의 시신은 밀라노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아고스티노 부스티[6]의 작업장에서 매우 정교한 무덤이 제작되었다. 이 무덤은 완성되어 조립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업적을 묘사한 고전주의 부조 패널과 누워있는 조각상 등으로 구성되어 프랑스 르네상스 미술의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무덤의 대부분 조각들은 스포르차 성에 전시되어 있다.
가스통의 누나 푸아의 제르메인은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와 결혼하여 나바라 왕국에 대한 가스통의 계승권을 주장하였고, 이는 페르디난드 2세의 나바라 침공으로 이어졌다.
4. 유산과 평가
가스통을 위해 밀라노의 아고스티노 부스티[6]의 작업장에서 매우 정교한 무덤이 의뢰되었다. 비록 완성되어 조립되지는 않았지만, 이 무덤은 예술사, 특히 프랑스 르네상스 미술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남아 있다. 계획대로라면 사르코파구스 기단 주변에 그의 캠페인을 묘사한 고전주의 부조 패널이 있고, 그 위에 좀 더 전통적인 누워 있는 조각상이 있어야 했다. 대부분의 조각들은 스포르차 성에 전시되어 있다.
루이 12세 국왕의 조카이자 안 드 브르타뉴 왕비의 사촌이었던 가스통은 1511년 21세의 젊은 나이로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캉브레 동맹 전쟁(광의의 이탈리아 전쟁)에서 활약했다. 용맹하고 과감한 전투로 프랑스군에 수많은 승리를 안겨주었지만, 1512년 4월 11일 라벤나 전투에서 전사했다. 프랑스군은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총사령관의 전사로 사기가 저하되었고, 이 승리를 전략적으로 유효하게 활용하지 못한 채 결국 퇴각을 강요당했다.
참조
[1]
서적
History of the reign of Ferdinand and Isabella, the Catholic
Sou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1962
[2]
서적
Louis XII
St. Martin's Press
1996
[3]
서적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ume VIII
Robert Appleton Co.
1910
[4]
서적
The Papacy and the Levant (1204-1571)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1976
[5]
서적
The Rise and Fall of Renaissance France
Blackwell
2001
[6]
서적
Renaissance and Reformation, Vol. 6
Marshall Cavendish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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